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러시아 발레 5 작품
안나 갈라이다, Russia포커스 특별기고
60년 전인 1957년, 볼쇼이 극장은 처음으로 일본 순회공연을 했다.
Russia포커스가 전 세계에 알려져 사랑 받는 가장 유명한 러시아 발레를 모아봤다. 오늘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높은 러시아 주요 발레 작품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고전무용의 백과사전'이라 불린다. 그리고 실제로 프롤로그와 대단원을 포함해 3막으로 된 이 발레에는 발끝으로 추는 고전무용과 팬터마임부터 민속무용과 '실물 그대로의' 베르사유와 퐁텐블로까지 고전발레 장르가 3세기 동안 이룬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이 모두에는 19세기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의 신이자 영웅인 거장 마리우스 프티파(사진 참조)가 있었다. 1890년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초연이 있기까지 그는 이미 30년간 마린스키 극장 수석 안무가로 군림했다. 그는 매년 새로운 공연을 여러 개 올렸는데, 이를 보는 관객들은 매일 레스토랑 요리를 먹어야 하는 운명을 가진 미식가의 피로를 느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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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72세의 안무가 프티파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통해 급진적 혁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의 공동창작자는 명성과 존경의 절정을 누리고 있던 표트르 차이콥스키였다. '백조의 호수'의 불운한 운명은 이 작곡가를 발레 극장으로부터 떠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황실극장들의 책임자를 맡고 있던 이반 프세볼로시스키는 호화로운 몽환극을 만든다는 생각에 열중하고 있었고, 그의 에너지는 그러한 몽환극 작업에 두 천재를 가담시키기에 충분했다. 협력은 쉽지 않았다. 프티파는 꼼꼼하게 4막 발레를 계획하고 작곡가에게 과제를 맡겼는데, 이 과제에는 음악의 성격, 템포 및 심지어 각 곡의 박자까지 미리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이러한 테두리 속에서도 자신만의 영감을 발견했다. 그 결과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음악은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가 됐다.
이 발레는 러시아 예술에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설적인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와 화가 알렉산드르 베누아가 어린 시절 다름아닌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처음 보고 발레에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볼쇼이 극장
'백조의 호수'


나온 지 140년 된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첫 발레작품 '백조의 호수'는 많은 이에게 발레의 상징이 됐다. 한편 이 발레의 운명은 평탄과는 거리가 멀었다. 백조의 호수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니라 일반 도시 모스크바에서 초연된 몇 안 되는 러시아 고전 발레 작품 중 하나다.
1877년 볼쇼이 극장의 발레 감독은 체코인 바츨라프 라이신게르였다.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오직 그가 백조의 호수를 기사 시대의 전형적인 발레 동화로 생각하고 최초로 무대에 올린 덕분이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당시 지방 극장이었던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흥행작이 될 만큼 성공적이었다. 27회 상연됐고 2년 후에는 레퍼토리에서 내려왔다. 이때 영원히 사라진 것 같았다.
1877 년, 모스크바에서의 '백조의 호수'
그러나 1894년 마린스키 극장은 차이콥스키 기념 파티를 열고 레프 이바노프가 새로 연출한 백조의 호수를 선보였다.

멋진 무늬를 이루는 백조 아가씨들의 군무는 한편으로는 민족성의 구현으로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과 이상적으로 어우러졌다. 이 성공은 백조의 호수를 황실무대로 돌려놓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안무 천재 레프 이바노프와 마리우스 프티파를 한 작품에 집결시켰다.
이바노프와 프티파 이후 백조의 호수는 여러 차례 개작됐다. 각 시대는 이 차이콥스키의 발레에서 그 시대만의 본질을 표현하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래서 백조의 호수는 때로는 억지로 변화에 응해야 했다. 1910년대에 알렉산드르 고르스키는 백조의 호수에서 러시아 '은시대'와 모더니즘 시대의 마지막 섬광을 구현하려 했으며, 1930년대에 아그리피나 바가노바는 레닌그라드에서 부르주아의 도덕을 비난했고, 1960년대에 유리 그리고로비치는 한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밝은 힘과 어두운 힘의 싸움이라는 아이디어를 발견했다. 1970년대에 존 뉴마이어는 아름다운 환상의 치명성을 보았다.
'백조의 호수'
볼쇼이 극장
모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 표현하고자 하는 이러한 각오들이 아마도 백조의 호수를 관객이 모스크바, 뉴욕, 도쿄, 런던 모두에서 보고 싶어하는 예외적인 발레로 만들기도 했다.
'바야데르카'

25년 전만 해도 '바야데르카'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외에서 상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볼쇼이 극장에서는 '망령들' 장만 상연됐고, 파리 국립 오페라단에서는 발레리노 루돌프 누리예프가 자신의 사망 바로 직전에 전체 극을 들여올 수 있었다. 발레리나 나탈리야 마카로바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와 영국 왕립발레단을 위해 자신의 버전을 제안하기 얼마 전이었다.
마리우스 프티파의 걸작은 위력으로 압도했다. '망령들' 장 한 장이 32명의 절도 있는 남성 무용수들의 군무와 고도의 기교를 가진 솔리스트 3명, 그리고 주연배우 1쌍이 필요하다. 그러나 '망령들'을 데리고 3막까지 가려면 우선 무희, 마술사, 승려들과 함께 사원의 불꽃 숭배 축제를 거행하고, 그 다음에는 그 이상의 인원이 출연하는 인도 국왕 딸의 약혼식 무대가 이어져야 한다.

2막은 왕실의 호화로움으로 꾸며진 결혼식 무대다. 12쌍이 부채춤을 추고, 또 남성 무용수 12명이 앵무새와 춤을 추고, 흑인 아이 8명, 인도인 11명, 무희 4명과 남성 무용수 6명이 대군무를 춘다. 솔리스트 몇 명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다.
거의 60년간 러시아 궁중에서 일해온 고전발레의 창조신 프티파는 돈을 아끼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신랄한 동시대인들의 언급에 따르면, 그의 작은 1막짜리 발레조차 작은 나라의 예산쯤은 날려버릴 수 있었다. 바야데르카는 한 번도 단발성 극에 포함된 적이 없다. 프티파는 1877년에 바야데르카를 만들고 그 후 30년간 가다듬어 격언 같은 정확성을 이뤄냈다.

소련 정부에서도 바야데르카는 개정됐다. 배반당해 죽은 무희의 열렬한 호소에 신들이 응해 그녀의 불성실한 연인과 그 약혼녀의 결혼식 때 두 사람 위로 궁전을 무너뜨려 징벌하는 내용인 4막을 잘라냈다.
그러나 프티파라는 필명 뒤에 수많은 편집자가 숨어있던 백조의 호수와 달리, 바야데르카는 완전성을 유지했다. 옛날에는 인도에서 사원의 무희를 바야데르카라 불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비록 현재 많지 않지만, 관객들은 무리 지어 이 발레를 보러 간다. 호랑이와의 싸움에서는 용맹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약한 뛰어난 무사를 차지하기 위한 아름다운 여승과 권력을 가진 공주의 경쟁이 불러 일으키는 무수한 감정은 인도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일으킨다.
'바야데르카'
볼쇼이 극장
'호두까기 인형'


러시아에서 '호두까기 인형' 티켓은 눈과 트리보다 훨씬 더 필수적인 성탄절의 확실한 징표다. 흰 무대의상을 입고 춤추는 눈송이들의 군무에 동반되는 아동 합창단의 투명한 목소리는 축제가 가져오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이상적으로 구현한다.
그러나 호두까기 인형이 성탄절과 불가분의 관계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20세기 중반 안무가 조지 발란신이 뉴욕시티 발레단을 위해 자신의 버전을 연출했을 때다. 극히 섬세한 음악 전문가 발란신에게 여행에 관한 동화를 세상의 모든 비극성을 흡수한 듯한 음악과 연결하는 문제는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조지 발란신의 청년 시절 이름은 그리고리 발란치바제였다. 그는 이 극에서 청년시절, 레닌그라드 오페라·발레 극장에서의 일과 유명한 레프 이바노프의 호두까기 인형에서 했던 자신의 고기교 광대 솔로를 상기한다. 프티파 시대의 영원한 2등 안무가였던 레프 이바노프는 프티파의 위대한 그늘에서 단 두 번 나왔던 적이 있다. '백조의 호수'의 '백조' 장과 '호두까기 인형'에서였다.
그러나 발레의 아이디어는 프티파의 것이었다. 차이콥스키와의 공동작업을 다시 한 번 하길 원한 이가 프티파였다. 자신과 같이 프랑스 출신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각색한 독일 낭만파 작가 호프만의 동화를 떠올리고 줄거리를 선정한 사람도 프티파였다. 프티파가 대본을 만들고 작곡가에게 방침을 전달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분명치 않은 이유로 그는 작품을 포기하고 3막으로 된 발레를 자신의 조수 이바노프에게 넘겼다.
이바노프는 1892년 연말 초연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극을 연출했다. 이 버전에서 나온 눈송이의 춤은 지금도 더 없이 탁월한 발레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춤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앙기아리 전투'가 사라진 일 만큼 애통하게 여겨지고 있다.
'호두까기 인형'
마린스키 극장

'스파르타쿠스'
사람들은 항상 러시아 극장들의 해외 순회공연에서 이 작품을 기대한다. 이 경우 신문들의 환호도가 0까지 떨어지는데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피날레에서 언제나 마치 축구클럽 '스파르타크'가 결정적인 골을 넣기라도 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스파르타쿠스'의 러시아식 표현이 '스파르타크'임).
안무가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위대한 발레 작품이 나오기 전까지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의 악보에 길고 행복한 운명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음악은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과 레닌그라드 키로프 극장(현 마린스키 극장)에서 거의 동시에 무대에 구현됐다. 게다가 이 구현은 군중장면과 군무의 천재 이고리 모이세예프와 20세기 안무의 가장 급진적인 혁신가 중 하나이자 에르미타주에 보존된 벽화와 화병들에 따라 로마인의 춤 언어를 만든 레오니드 야콥손에 의해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권력 기구에 대항한 고대 로마 검투사의 전설적인 영광은 다른 버전에서 부활했다. 이 영광은 1968년 40세의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모스크바에서 실현했다. 그리고로비치는 화가 시몬 비르살라제와 함께 마치 공연장으로 바로 돌진하는 듯한 봉기한 노예들의 무리와 허심탄회한 독백들의 위력이 결합된 극을 만들었다. 이 속에서 고통 받으면서 반신반의하며 수 백 명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는 스파르타쿠스와 잔혹하고 치밀한 로마의 사령관 크라수스가 맞선다. 둘을 위해 그리고로비치가 한 안무는 현대 발레계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교성을 갖고 있다. 이 덕분에 두 사람의 직업적 대립과 역사적 대립은 지금까지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스파르타쿠스'
볼쇼이 극장
글 - 안나 갈라이다
편집 - 올레크 그라스노프, 브세볼로드 풀랴
사진 제공: Getty Images, AP, 로이터, AFP/East News, 데니스 유수포브/볼쇼이 극장, 기록 사진,
알렉산드르 크랴제프; 이고리 루사크; 레소프/ 리아노보스티,
바실리 스미르노프; 유리 벨린스키 / 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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